병원 UX 프로젝트의 경험

이중식 서울대학교 융합대학원 교수

 

 

 

 

 

병원은 자신을 서비스 회사라 생각한다
우리가 UX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체크하는 것이 있다. 클라이언트
회사의 가치 체계에 ‘서비스’가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프로젝트를 하는 대상 기업이 ‘서비스 기업’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서비스에 대한 개념이 없는 회사는 UX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프로젝트가 끝날 때 쯤 가서 분쟁이 발생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회사가 서비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회사의 비전이나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살펴볼 수 있다. 명확한 문구로
서비스를 정의해 놓았다면 회사 내부에서도 서비스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회사 조직 내에 UX와 관련된
임원과 직군이 있는지, 이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한다.
우리는 병원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서울대학교병원의 책임자와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를 나누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은 ‘의료’와 ‘서비스’를 동등한 가치로 보고자 했다.
물론 지난 수 십년간 공급자 중심의 의료를 제공해 온 병원이 하루 아침에 사용자인
환자 중심으로 변신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병원이 최선의 가치를 환자에 두겠다고 밝히는 것은 꽤나 고무적인
의지라 볼 수 있다. 사실 의료 활동은 그 대상과 목적 자체가 환자의 건강이기에
사용자를 위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다. 하지만 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불쾌함과
불안감을 느낀다면 사용자 중심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요즘 병원들은
새로운 바람으로 꿈틀대고 있다. 병원이 서비스 중심으로 재탄생하 게 된 동기는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의 Center for Innovation을 선두로 한 세계적 추세로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으나, 서비스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적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프로젝트 내내 병원의 여러 리액션을 통해 확인됐다. 의료활동의


아주 깊은 곳, 예를 들면 두개골이 절단되는 수술실이나 외화 ER처럼 긴박히 돌아가는
응급실에서 우리가 충분한 시간 관찰하고 깊은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정리해줬고,
기술과 UX의 결과가 심각하게 충돌할 때 ‘답은 사용자’라고 맞장구를 쳐줬다. 바로
기존 SW개발에서 중요시 여겼던 Back-end의 완결성 보다 사용자 접점인 Front-end의
쾌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병원은 기록의 궁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검사와 변호사들이 사건 기록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범행을
판단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병원 프로젝트를 하기 전까지, 나는 법조계야 말로 세상의
모든 일들을 ‘기록’으로 만들고 판단하는 특이한 도메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프로젝트의 뚜껑을 열어보니, 병원은 법조계보다도 훨씬 더 ‘기록’에 집착하고 있었다.
환자와의 대화 한마디 한마디가 기록되고, 의사의 진료에 대한 판단이나 약에 대한
처방도 모두 기록된다. 또한 몸이 만드는 생체 신호, 몸의 일부를 분석한 검사정보들도
모두 기록된다. 이쯤 되니, 병원에 들어간 환자는 거대한 기록의 흔적을 남기고
돌아온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면 병원은 왜 이렇게 기록에 집착하는가? 그 이유는 옛날에 비해 의료의
분야가 다양해지고 협업할 일이 많아지면서, 기록만이 객관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료사고가 날 경우 기록은 시비를 가리는 증빙자료로
사용되기에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다. 한편, 병원이란 수익 조직에 있어서 기록은 곧
돈이다. 모든 기록은 보험수가 산정과 연동되기 때문에 기록이 곧 매출과 직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엄청난 기록이 담긴 전자차트는 환자뿐만 아니라 의사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기록’이다. 기록하느라 의사가 환자의 얼굴을 쳐다 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일반 외래 진료실뿐만 아니라 응급실에서도 의료진들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하나도 빠짐없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록에
관련된 문제를 풀 수 있다면 병원 UX의 근본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차트는 문서가 아니라 프로그램에 가깝다
전자차트는 환자의 병증과 의료 행위를 기록해 놓은 환자별 장부이다. 환자가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차트가 한 줄 씩 늘어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전자차트는 일반 워드
문서보다는 블로그나 페이스북과 비슷하다. 하지만 한 환자에 대한 전자차트가 한
사람에 의해서만 작성되고 관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르다. 병원 내의 여러 의료진에
의해 기록되고 열람되는 일종의 공동기록장인 것이다. 더구나 이 기록은 다음
열람자에게 특정한 행동을 부탁,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수행문으로 구성된

프로그램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진료실의 의사는 검사부에 특정 검사를 해 줄
것을 전자차트에 오더하고, 검사부에선 생체 검사 결과를 차트에 소견으로 남긴다.
의사는 이를 바탕으로 수술을 결정하고, 차트에 수술을 요청한다. 수술장에서는 의사가
기재한 방식을 확인하면서 환부를 절개하고 수술을 실시한다. 차트를 통해 의료진이
해야 할 일들이 릴레이 된다는 차원에서 병원의 전자차트는 여러 명의 코더가 하나의
프로그램(건강해지는 환자)을 완성해 나가는 특수한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한편 의료행위가 엄청난 협업이라는 면을 생각해보면 전자차트는 카톡 그룹
대화방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응급실에서는 차트를 열어 놓고 관련 의료진에게
바로 콜하거나 다른 과에 의뢰를 하기도 한다. 진료실의 의사는 검사를 보낸 환자의
검사결과가 실시간으로 뜨길 기다리며 전자차트를 끊임없이 새로고침(refresh)한다.
하나의 병증에 대해 의사, 간호사, 검사실, 수술실 등이 실시간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단순 문서가 아닌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림 1처럼 의료정보를 모델링해 볼 수 있었다. 먼저 우측과 같이 한
사람은 일생동안 여려 병증을 겪게 되며, 그때 마다 병원을 찾게 된다. 이렇게 병원을
찾은 환자는 좌측과 같이 원무에서 행정 정보를 입력하고, 의사를 찾기 전후로 기본적인
검사를 마친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는 진단을 하고 처치를 내린다. 마지막으로
환자는 수술이나 입원 혹은 약 복용 등의 치료를 받으며 경과 정보를 발생시킨다. 즉
하나의 병은 다면체적 기록의 구조를 가지며 병원 내 여러 의료진들은 이러한 정보
큐브를 빙글 빙글 돌려가며 환자와 상호작용한다.

 

 

 


그림 1: 의료정보의 다면적이며 시간적인 컨셉 모델

 

의사들은 똑똑한 사용자
전자차트의 사용자는 의사다. 우리가 병원 프로젝트를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환자를 관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환자가 아닌 의사를 관찰하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병원 안을 누비는 의사들은 정말 바쁘다. 출근은 당연히 빠르고,
퇴근은 당연히 늦다. 촌각을 다투며 사투를 벌이는 환자들이 많아서인지, 1분 1초도
아끼며 생활한다. 병원 안의 모든 활동은 상당한 긴장감을 동반하며 긴박하게 돌아간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 의사는 무심한 사람, 어려운 사람이 되어 버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의사들이 무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들이 항상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환자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차 있다.
의사들을 조사하다 보니, 특이한 점이 발견됐다. 일반 사용자에 비해 의사 집단이
지식 수준과 탐구력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존 전자 차트가 가진 불편을
학습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차트의 부족한 기능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열심히 배우거나
자기만의 방식을 터득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전자차트에
대한 요구사항 취합 과정에서 이들은 꽤나 정교하게 불편과 불편의 원인을 짚어냈다.
생생하고 정확한 불편사항의 청취야말로 새로운 전자차트를 설계하는 중요한 초석이
된다. 물샐 틈 없는 불편을 잡아내는 사용자인 의사들은 이들이 전자 차트에서 보고
싶어하는 희망사항도 정확히 그려냈다.
그러던 중, 프로젝트 후반부에 의사들이 작성한 문서 하나가 우리 쪽에 전달돼 왔다.
문서의 제목은 ‘환자의 정보는 어떤 모양이며, 우리는 무엇을 보기 원하는가?’였다. 이
문서에는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의 정보가 전자차트에서 어떤 식으로 보여지면 좋을지
담겨있었다. 여러 합병증은 가진 환자일 경우 단면도, 병력이 오래된 환자일 경우
종적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이어그램과 함께 보여주며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장소, 병원
병원에서의 의사결정은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에 특히 중요하다. 과연 기존의 ‘전자
차트는 의사결정을 스마트하게 도와주고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이번
프로젝트는, 사용자 리서치를 통해 스마트한 전자차트의 UX 콘셉트를 제시하고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답을 제시했다. 결과도 결과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우리 입장에서도 얻은 것이 많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병원의 변화의지, 기록과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 스마트한 의사를 직접 경험하며
배운 것과 느낀 것이 많다. 다시 생각해봐도 병원은 매력적인 장소이고, UX 측면에서
가능성도 많은 공간이다. *






Posted by kipf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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